많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신앙인이 아니고 교회 회원에 그치는 것은 깨달음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까지는 알지만 구원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지 못하거나 잃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회당을 출입하면서 모든 예배나 기도회나 모임에 참석하면서 열심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자부하게 되고 자기 인본적 바탕의 역량껏 세도도 부리면서 소위 신앙생활(인간적 교제)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교회당을 열심히 출입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신앙인이라고 하기에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내가 죽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의 교회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어야 하나 죽지 못해서 사는 겉만의 그리스도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의 신앙생활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각자의 믿음과 신앙생활이 옳은 것인지 옳지 않은 것인지를 가늠하기를 바란다. 바울 사도의 독특한 신앙과 신학적 깨달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내가 죽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이었다.
1. 바울의 일차적인 죽음의 체험 -'사흘 동안 소경이 되었다'로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죽음은 이미 사도행전 9장에서 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려고 가던 바울(사울)은 빛 속에 나타나신 주님으로부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 9:4~5)"는 음성을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고 사람의 손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바울이 빛이신 주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일어난 사건은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된 것이다. 이는 옛사람인 사울의 죽음의 선고와 같다(바울은 거듭나기 전에 사울이라 불렀고 거듭난 후에 바울로 개명되었다).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되었다(행 9:9).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흘과 같은 수의 날이다. 이 숫자의 소경 됨이나 죽음의 의미는 죄의 소멸이요 옛사람의 소멸이며 새 생명의 준비 기간이요 부활 생명의 준비 기간인 것이다. 지금까지 보고 배우고 믿고 따른 세상에 대하여 눈을 감게 만든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2. 바울의 이차적인 죽음의 체험 - '십자가에서 죽었다'로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갈 6:14)."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 율법주의자요 육신적 할례의 흔적을 가진 자이다. 그것으로 자기의 자랑을 삼았고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였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자로 변한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예수의 흔적은 십자가의 흔적이다. 육신적 할례의 흔적이 육신을 자랑하는 것이었다면 십자가의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태어난 자요, 새로 지음받은 자요,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힌 자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바울이 깨닫고 전파하는 죽음의 체험인 십자가의 흔적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인가이다. 그리스도인 -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 지배하는 사람 - 십자가의 흔적을 가진 사람 -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 -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라는 도식이 간추려지는 것이다.
3. 바울의 3차적인 죽음의 체험 -'세상의 핍박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된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담으로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활의 첫 열매라고 전재하고 그 부활의 능력으로 인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죽음을 무릅쓴다는 것이며(고전 15:30), 바울 사도 자신은 그러기에 날마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죽음을 체험하면서 살고 있다고 고백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자가 자기 생명을 아끼면서 복음을 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예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파할 수밖에 없다고 간증한 것이다. 육체적 생명을 담보로 영적 생명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복음 전도자라는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교회당을 출입하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교회당을 다니다가 목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고, 집사도 되고, 신학생도 되고, 되고, 되고…의 사람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교회당도 세우고, 선교도 하고, 착한 일도 하고, 이름도 내고… 이런 사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거듭나서 십자가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날마다 육신과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고 또 못 박으며 복음과 더불어 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엔 크리스토 예수) 있는 신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선교도 하고 착한 일도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 사도의 첫 번째 죽음인 소경 됨의 체험과(세상에 대하여 죽음의 상징으로서의 눈이 멀음), 두 번째 죽음인 십자가의 흔적으로서의 죽음의 체험과(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연합으로 세상에 대하여 죽은 죽음의 체험), 세 번째 죽음인 날마다의 죽음의 체험(세상의 위협과 공격으로부터의 죽음 체험)을 감수하면서도 십자가를 든든히 붙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으며 십자가를 사랑하고, 십자가로 자랑하며, 십자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내가 죽었다는 의미이며 영적으로 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